모두의 당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모두의 당은 2009년 8월 자유민주당에서 분리된 와타나베 요시미가 창당한 일본의 정당이다. 민주적인 정부 운영과 규제 완화, 감세,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 5석, 2010년 참의원 선거에서 10석을 얻었다.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18석으로 의석수를 늘렸으나, 지지율 하락과 노선 갈등으로 2014년 11월 해산되었다. 해산 당시 소속 국회의원은 20명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014년 해산된 정당 - 통합진보당
통합진보당은 2011년 여러 정당의 통합으로 결성되어 2012년 총선에서 제3당으로 도약했으나, 부정, 분열, 내란음모 혐의 등의 논란 끝에 2014년 헌법재판소의 해산 결정으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해산된 정당이다. - 2014년 해산된 정당 - 일본유신회 (2012년)
일본유신회는 하시모토 도루를 중심으로 창당되어 작은 정부, 규제 완화, 헌법 개정 등을 내세웠으나, 내부 갈등으로 해산되고 여러 정당으로 분열된 일본의 정당이다. - 일본의 보수주의 정당 - 공명당
공명당은 1964년 창설된 일본의 정당으로, 창가학회를 기반으로 중도 정치를 표방하며 자유민주당과 연립 정권을 유지하고, 인간 중심의 정치와 복지 정책을 중시하며 헌법 개정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한다. - 일본의 보수주의 정당 - 일본유신회 (2016년)
일본유신회는 오사카 이신노카이에서 시작하여 당명 변경을 통해 현재의 명칭을 사용하며, 행정 개혁, 지방 분권, 경제 정책 개혁 등을 추진하는 일본의 정당이다. - 2009년 설립된 정당 - 헝가리 녹색당
2009년 창당된 헝가리 녹색당은 환경 보호, 지속 가능한 개발, 부패 척결을 주요 의제로 삼고 총선에서 의회에 진출했으며, 당내 분열과 당명 변경, 유럽 녹색당으로부터 당적 정지 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석을 유지하고 있다. - 2009년 설립된 정당 - 오성운동
2009년 베페 그릴로가 설립한 이탈리아의 정치 운동인 오성운동은 직접 민주주의, 반부패, 환경주의, 반체제적 성향을 특징으로 하며,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하여 2013년 총선에서 제2당, 2018년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했으나, 이후 지지율 하락과 내부 분열을 겪으며 이념적 스펙트럼과 정책 일관성 부족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모두의 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창립자 | 와타나베 요시미 |
창립일 | 2009년 8월 8일 |
해산일 | 2014년 11월 28일 |
분리 정당 | 자유민주당 민주당 |
해산 사유 | 당내 내분 및 노선 갈등 |
후계 정당 | 결속의 당 일본을 건강하게 하는 모임 투쟁하는 개혁의 모임 모두의 개혁 자유를 지키는 모임 |
본부 소재지 |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히라카와 정 2번지 6-1 히라카와 정 빌딩 9층 |
웹사이트 | 모두의 당 |
이념 및 정치적 성향 | |
이념 | 신자유주의 탈관료 작은 정부 지방 분권 행정 개혁 보수자유주의 |
정치적 위치 | 중도우파 |
기타 정보 | |
기관지 | 월간 모두의 당 |
상징색 | 빨간색 (공식) 핫 핑크 (관례) |
영문 표기 | |
영어 이름 | Your Party |
일본어 표기 | |
일본어 이름 | みんなの党 |
로마자 표기 | Minna no Tō |
의미 | 모두의 당 |
2. 역사
자유민주당에서 분리된 와타나베 요시미가 이끌던 모두의 당은, 아소 다로 총리가 일본 중의원을 해산한 후인 2009년 8월 8일에 창당되었다.[3] 이 정당은 감세, 자본주의, 작은 정부, 규제 완화를 옹호했다.
2009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5석, 2010년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10석, 2012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18석을 획득했다. 2011년 일본 통일 지방 선거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2013년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는 8석을 얻었으나, 일본유신회와의 협력 관계 해소로 인해 여러 선거구에서 공멸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선거구 | 결과 |
---|---|
이바라키현 선거구 | 공멸 |
지바현 선거구 | 공멸 |
도쿄도 선거구 | 공멸 |
후쿠오카현 선거구 | 공멸 |
가나가와현 선거구 | 당선 (일본유신회 후보 제압) |
아이치현 선거구 | 당선 (일본유신회 후보 제압) |
미야기현 선거구 | 당선 (민주당 현직 후보 제압) |
사이타마현 선거구 | 당선 (민주당 현직 후보 제압) |
2013년 12월, 에다 겐지를 포함한 14명의 의원들이 특정 비밀 보호법 수정 협의 과정에서 와타나베 요시미 대표의 여당 편향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탈당하면서 모두의 당은 분열되었다.[33][34][10][37]
2014년 와타나베 요시미 대표는 화장품 회사 DHC 회장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차입한 사실이 드러나 대표직에서 사임했다.[45] 아사오 케이이치로가 신임 대표로 선출되었으나,[49] 당내 노선 대립이 심화되면서 2014년 11월 19일 모두의 당 해산이 결정되었고, 11월 28일 정식으로 해산되었다.[5]
2. 1. 창당 배경 (2009년)
2009년 2월, 와타나베 요시미, 에다 겐지 등 중의원 의원들이 국민 운동체 일본의 새벽을 발족했다.[7] 이는 모두의 당의 전신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8일, 자유민주당과 민주당을 탈당한 의원 3명이 합류하여 모두의 당을 결성했다.[17]당명은 사잔 올 스타즈의 곡 '모두의 노래'에서 유래했다. 와타나베 요시미는 당명 후보로 "유대"를 제안했지만, 에다 겐지는 "모두의 당"을 제안했다. 결국 소속 국회의원 5명의 투표 결과 3대 2로 "모두의 당"으로 결정되었다. 아사오 케이치로, 에다, 히로츠 모토코가 "모두의 당"을, 와타나베, 야마우치 코이치가 "유대"를 지지했다. 와타나베는 "내가 창업자다"라고 주장하는 등 오너 의식이 강해 '나의 당', '와타나베 당' 등으로 야유받기도 했다.[19]
모두의 당은 결당 선언에서 "자민당에는 불만이 많지만, 민주당에는 불안이 많다"는 유권자의 그릇이 되고자 했다.[20] 또한, 특정 업계나 노동조합에 의존하지 않고 국민에게 뿌리내린 정당을 표방했다.[20] 와타나베는 기자 회견에서 관료에 의존하는 자유민주당, 노조에 의존하는 민주당과는 달리, 진정한 개혁을 할 수 있는 것이 모두의 당이라고 주장했다.[17]
2. 2. 제45회 중의원 선거 이후 (2009년 - 2010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모두의 당은 소선거구 2석, 비례대표 3석으로 총 5석을 획득하여 정당 요건을 유지했다.[17] 비례대표 선거에서는 7개 블록에서 사회민주당에 육박하는 득표수를 기록했고, 미나미칸토 및 기타칸토 블록에서는 일본공산당을 앞서는 득표수를 얻었다. 그러나 중복 입후보 제도의 영향으로 긴키 및 도카이 블록에서는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3]2009년 9월 16일 제172회 국회 수반 지명에서는 하토야마 유키오에게 투표했다. 다음 날, 민주당이 뇌물죄로 실형 판결을 받고 상고 중인 스즈키 무네오를 외무위원장으로 선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반대했다.
2009년 12월 1일에는 무소속 가와다 류헤이 의원이 입당했다.
모두의 당은 창당 초기부터 정계 재편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으며, 당의 존속에 얽매이지 않는 방침을 표방했다.[21] 하토야마 내각 출범 이후, "정치와 돈" 문제로 지지율이 하락한 민주당과 지지율 회복에 실패한 자민당의 대안으로 주목받으며 지지율이 상승했다.[22] 2010년 2월 마이니치 신문 여론조사에서는 공명당을 넘어선 6%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야당 제2당의 위치에 올랐다.[23]
이후 모두의 정치 학원과 모두의 세미나를 개강하여 정치 인재 양성에 힘썼다.
2. 3. 제22회 참의원 선거 이후 (2010년 - 2012년)
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모두의 당은 선거구 3석, 비례대표 7석을 획득하여 총 10석을 얻었다.[4] 이로써 원내 교섭 단체 자격을 얻어, 참의원 본회의의 대표 질문 권한, 예산이 따르지 않는 법안의 참의원 제출, 참의원에서의 의원 운영 위원회 이사 및 예산 위원회 이사 배출이 가능해졌다.2011년 1월 29일, 도쿄도의 호텔 뉴 오타니에서 창당 이후 첫 당대회인 '모두의 당 대회 어젠다 2011'을 개최했다. 약 500명이 참가했으며, 개회식은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같은 해 2월 9일, 당수 토론 참가를 희망했으나, 당 대표 와타나베 요시미가 국가 기본 정책 위원회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이후 2012년 4월, 와타나베가 국가 기본 정책 위원회에 소속되면서 당수 토론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2011년 통일 지방 선거에서는 도도부현 의원 41명, 정령 지정 도시 의원 40명이 당선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미에현 지사 선거에서는 자민당과 함께 추천한 스즈키 에이케이가 당선되었다.
오사카부 지사 선거와 오사카 시장 선거에서는 오사카 유신의 회를 지원하여, 마쓰이 이치로와 하시모토 토루가 각각 당선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오사카 유신의 회와 교육 기본 조례안 관련 질의서 제출, 지방 자치법 개정안 공동 작성 등 협력을 강화했다.
2012년 9월 11일, 일본 유신의 회 합류를 위해 우에노 히로시, 사쿠라우치 후미키 참의원 의원이 탈당계를, 오구마 신지 의원이 제적계를 제출했다. 모두의 당은 이들의 의원직 사퇴를 요구하며 비판했고,[24] 9월 25일 우에노와 사쿠라우치의 탈당계가 수리되었다. 이로 인해 모두의 당과 일본 유신의 회 관계는 악화되었다.
같은 해 9월 28일, 대표 선거에서 와타나베 요시미가 재선되었다. 10월 16일에는 스기모토 가즈미가 입당했다.
2. 4. 제46회 중의원 선거 이후 (2012년 - 2013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모두의 당은 제3극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여러 정당과 협력 및 대립 관계를 겪었다.일본유신회와는 정책 협정을 체결하고, 경합하지 않는 선거구에서는 상호 선거 협력을 추진했다. 이시하라 신타로가 이끄는 태양의 당과는 도지사 선거 및 도의원 보궐 선거에서 선거 협력을 위한 가(假) 제휴를 맺었다. 그러나 일본유신회가 태양의 당과 합병하면서 모두의 당에 합류를 요청했지만, 모두의 당은 일본유신회가 일어나라 일본의 색채가 강해진 것에 난색을 표하며 합류를 거부했다. 또한, 일본유신회가 모두의 당이 이미 후보를 낸 선거구에도 후보를 내면서 양당은 대립하게 되었다. 도쿄 2구, 도쿄 5구, 도쿄 6구, 나가노 3구 등에서는 두 당의 후보 득표수를 합하면 당선된 다른 당 후보의 득표수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당 모두 낙선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오자와 이치로 등이 결성한 일본 미래의 당에 대해서는 "아젠다가 일치하면 협력한다"는 입장이었지만, 경합하는 선거구에서는 역시 대립했다.
2012년 11월 16일 중의원 해산 이후, 민주당에서 제명된 도미오카 요시타다와 민주당을 탈당하여 감세일본 회파에 가입했던 무소속 다이라 토모유키가 모두의 당에 입당했다.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모두의 당은 소선거구 4석, 비례대표 14석을 얻어 총 18석으로 의석을 2배 늘렸다. 특히 비례대표 득표가 증가하여 도호쿠, 호쿠리쿠 신에쓰, 도카이, 긴키, 큐슈에서 처음으로 의석을 획득했다. 미나미칸토, 도쿄 블록에서는 공명당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2013년에는 민주당을 탈당한 요네나가 하루노부와 미도리의 바람 소속이었던 교다 쿠니코가 모두의 당에 입당했다.
2013년 5월 21일, 모두의 당은 일본유신회와의 협력 관계를 해소한다고 발표했다. 다만, 일본유신회가 모두의 당을 지원하는 것은 거부하지 않았다. 모두의 당은 일본유신회에 태평양 전쟁을 일본의 침략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유신회는 이를 거부했다.
2. 5. 제23회 참의원 선거 이후 (2013년)
제23회 참의원 선거에서 모두의 당은 8석(선거구 4석, 비례대표 4석)을 획득하여 개선 의석 수를 넘어섰다. 그러나 일본유신회와의 협력 관계 해소로 인해 양측이 후보를 옹립하면서 이바라키현 선거구, 지바현 선거구, 도쿄도 선거구, 후쿠오카현 선거구 등에서 공멸하는 결과가 나타났다.[27] 비례대표 득표수도 일본유신회에 미치지 못하는 475만 표(8.93%)에 그쳤으며,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획득한 10석(선거구 3석, 비례대표 7석)과 794만 표(13.59%)에도 미치지 못했다.선거구 | 결과 |
---|---|
이바라키현 선거구 | 공멸 |
지바현 선거구 | 공멸 |
도쿄도 선거구 | 공멸 |
후쿠오카현 선거구 | 공멸 |
가나가와현 선거구 | 당선 (일본유신회 후보 제압) |
아이치현 선거구 | 당선 (일본유신회 후보 제압) |
미야기현 선거구 | 당선 (민주당 현직 후보 제압) |
사이타마현 선거구 | 당선 (민주당 현직 후보 제압) |
가나가와현 선거구와 아이치현 선거구에서는 일본유신회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고, 일본유신회가 후보를 옹립하지 않은 미야기현 선거구와 사이타마현 선거구에서는 민주당 현직 후보를 꺾는 등 선전했다. 특히 미야기현 선거구에서는 모두의 당 최초로 2인 선거구에서 의석을 획득했다. 모두의 당과 일본유신회 양당의 획득 의석 및 비례대표 득표수의 합계는 야당 제1당인 민주당을 넘어섰다.
2013년 8월, 후쿠오카현 선거구에 출마했던 모두의 당 전 후보가 공직선거법 위반(매수 약속 등) 혐의로 후쿠오카현 경찰에 체포되었다.[27]
2. 6. 에다 그룹 집단 탈당, 분열 (2013년 12월)
2013년 12월 8일, 에다 겐지는 특정 비밀 보호법 수정 협의에서 와타나베 요시미 대표가 여당 쪽으로 기운 것에 대해 "당내 논의는 2시간도 안 되어 강행 처리되었다. 모두의 당은 결당의 원점을 잃었다"라고 주장하며 탈당을 표명했다.[33] 같은 달 9일, 에다를 포함한 아오야기 요이치로, 시이나 타케시, 코이케 마사나리, 이사카 노부히코, 하타나카 미츠나리, 오노 지로, 카와다 류헤이, 테라다 노리시게, 후지마키 유키오, 마야마 유이치, 시바타 타쿠미 등 중참 의원 14명이 탈당계를 제출하면서 모두의 당은 사실상 분열되었다.[34][10][37]모두의 당은 에다에 대해서는 탈당계를 수리하지 않고 제명 처분(제적)했으며, 비례대표로 당선된 중참 의원 13명의 회파 이탈을 인정하지 않고 의원 사직을 요구했다.[36][37]
에다 등 탈당 그룹은 먼저 탈당한 카키자와 미토와 함께 중참 의원 15명으로 같은 달 18일에 신당 유이노토를 결성했다.[38]
도쿄도의회에서는 2013년 12월, "도쿄도의회 모두의 당" 소속 3명이 유이노토 결성에 참여했다. 이들은 2014년 1월, 회파 명칭을 "도쿄도의회 유이노토"(노가미 대표)로 변경했다.
2. 7. 제2차 아베 내각 접근 (2014년)
2014년 2월 23일에 열린 당 대회에서 와타나베 요시미 대표는 모두의 당을 보수 정당으로 규정하고, 헌법 해석 변경을 통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등 아베 정권의 경제, 안전 보장 정책에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41] 이에 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은 당 대회에 "책임 정당으로서 함께 정치를 이끌어 갑시다"라는 축전을 보내 연대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41]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는 "(모두의 당은) 책임 야당으로서 건설적인 제언을 하고 있다"라고 평가하는 등,[42] 모두의 당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다른 야당들과 달리 모두의 당은 자율 투표를 결정했다. 와타나베 대표는 개인적으로 자민·공명당 양당이 추천하는 마스조에 요이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43]
종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모미이 카츠토 회장의 발언 등으로 민주당, 일본유신회, 일본 공산당 등 다른 야당들이 NHK의 2014년도 예산안에 반대한 반면, 모두의 당은 주요 야당 중 유일하게 찬성표를 던졌다.[44]
2. 8. 와타나베 체제 종언 (2014년 4월)
2014년 3월, 와타나베 요시미 대표가 화장품 회사 DHC 회장 요시다 요시아키로부터 제22회 참의원 선거 직전에 3억엔, 제46회 중의원 선거 직전에 5억엔을 차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차입금은 정치 자금 수지 보고서에 기재되지 않아, 공직선거법 및 정치 자금 규정법 위반 의혹이 제기되었다.[45][46]와타나베 대표는 처음에는 "개인적인 차입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당내에서 대표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사토 마사오, 와다 마사무네 두 의원이 대표 사임을 요구하는 기자 회견을 여는 등 당내 혼란이 계속되었다.[47] 결국 4월 7일 와타나베 대표는 다시 기자 회견을 열고, 차입금은 본인이 아닌 당의 선거 비용으로 사용했으므로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해명하며,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사임할 것을 표명했다.[45]
당분간 아사오 케이이치로 간사장이 대표직을 대행하고, 같은 달 11일에 당 소속 의원들의 대표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으나,[48] 아사오 외에 입후보자가 없어 무투표로 아사오가 신임 대표로 선출되었다.[49] 간사장에는 미즈노 켄이치 정책조정회장, 정책조정회장에는 나카니시 켄지 정책조정회장 대리가 각각 승격되었다.[50]
아베 내각은 모두의 당과의 연계를 중시했기 때문에,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은 와타나베에 대한 강한 비판을 자제하며, 앞으로도 모두의 당과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51] 아사오 신임 대표 또한 야당 재편과는 거리를 두고, 아베 내각에 대한 협력 자세를 보여온 와타나베 전 대표의 노선을 계승할 것을 표명했다.[49] 초대 대표인 와타나베의 차입금 문제는 모두의 당 지지율 하락의 큰 원인이 되었다.
2. 9. 노선 대립 심화, 잇따른 탈당 (2014년)
유이노토, 일본 유신의 회 합당 구상과 모두의 당 내부 움직임으로 에구치 가츠히코 최고 고문이 2014년 6월 탈당했다.[5] 에구치 가츠히코는 2014년 8월 차세대의 당에 입당했다.[5] 와타나베 요시미 전 대표와 아사오 케이이치로 대표의 노선 대립이 격화되면서 오쿠마 토시아키가 2014년 9월 탈당했다.[5]2. 10. 해산 (2014년 11월)
제4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당내 분규가 심화되자, 아사오 케이치로 대표는 2014년 11월 19일에 열린 양원 의원 총회에서 모두의 당 해산을 결정했다.[5] 2014년 11월 28일, 모두의 당은 정식으로 해산되었다. 해산 이유는 당내 대립과 '여당 보완 세력'과의 간극 때문이었다. 남은 정당 교부금은 국고에 반납하기로 결정했다.2. 11. 해산 이후
모두의 당은 이전부터 각 지방 의회에서 공인 후보가 당선된 후나 임기 중에 당을 떠나거나 분열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이의 당 결성 과정에서도 많은 지방 의원들이 이에 참여했다. 당 해산 당시 지방 조직에 대한 당 본부의 통지나 지시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당 해산 시점에 남아있던 각 지역의 모두의 당 지부나 지방 조직은 각각 해산되거나, 지부 명칭을 변경하여 활동했다. 특히 와타나베 요시미 전 대표와 가까운 지방 의원들은 "투쟁하는 개혁의 모임"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고[80], 해산 당시 대표였던 아사오 케이이치로와 가까운 의원들은 "모두의 개혁"에 참여했지만, 제18회 통일 지방 선거 이후 대부분 사라졌다. 또한 무소속이 되더라도 모두의 당이라는 명칭을 유지하며 활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모두의 당은 '탈관료', '지역 주권', '생활 중시'를 3대 핵심 정책으로 내세웠다.[20]
참의원 회파 "일본을 활기차게 하는 모임·무소속의 회"에 참여하는 교다 구니코 참의원 의원은 사이타마현 내의 구 모두의 당 소속 지방 의원 및 예정 후보자들과 함께 정치 단체 "미래의 사이타마를 만드는 모임"을 설립했다[89]. 이는 모두의 당 출신 인사들의 연구 모임 및 선거 상호 지원을 위한 모임으로 자리매김했다.
3. 정책
또한, 일본 은행법 개정을 통해 화폐에 대한 개입을 주장했다.[71]
'''외교 및 안전 보장'''
'''경제 정책'''
모두의 당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70] 감세와 세출 확대를 동시에 추진하고, 일본 은행법 개정을 통해 금융 정책에 변화를 주고자 했다.[72]
일본 은행법 개정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추진하려 했다.[72]
이를 통해 중앙 정부의 경기 관리 및 일본 은행 독립성 축소 방향 제시.[72]
모두의 당 경제 정책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디플레이션 탈피, 명목 4% 이상 경제 성장 실현 목표.
'''기타'''
- IT 행정 일원화, 모든 분야 적극 활용
- 특구 창설
- 헌법 개정
- 소셜 미디어 활용[73]
3. 1. 탈관료
모두의 당은 국가 공무원 수 감축, 급여 삭감, 낙하산 인사 금지, 규제 완화, 공영 사업 민영화를 통해 '탈관료'를 추진했다.[20]3. 2. 지역 주권
"끈 달린 보조금"과 지방 교부세 폐지를 통해 지방으로 재원을 이양하고, 지역 주권형 도주제 도입을 통한 "지역 주권"을 주장했다.[20]3. 3. 생활 중시
모두의 당은 경제 성장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고,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여 저소득층을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정책들을 제시했다.[20]- 저소득층 지원:
- "급여 부착 세액 공제 방식" 도입
- 생활 보호의 "모자 가산" 부활
- 고액 소득자 과세 강화:
- 소득세, 상속세 등 과세 강화
- 기초 연금 및 생활 보호를 통합한 "미니멈 인컴" 도입
또한, 일본 은행법 개정을 통해 화폐에 대한 개입을 주장했다.[71]
3. 4. 외교 및 안전 보장
- 아시아 속의 일본"을 중시하는 외교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ODA의 전략적 운용, 온실 가스 감축 목표를 1990년 대비 2020년에 25%, 2050년에는 80% 감축으로 설정하고 있다.
- 미일 안보 체제 강화, 배려 예산 재검토[20]
- 자위권 행사, 테러·미사일 등 새로운 다양한 위협에 대비[20]
- 자위대의 해외 파견을 정하는 법률 제정[20]
- 해적 대책·평화 활동·재해 구조·인도, 부흥 지원을 중심으로 적극 참여[20]
-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유엔 안보리)의 상임 이사국 진출을 목표로 한다.[20]
- 영주 외국인에 대한 지방 선거권 부여 (외국인 참정권)에 반대한다.[69]
3. 5. 경제 정책
모두의 당은 "작은 정부" 노선을 기본으로 하여[70], 재정 정책에서는 감세와 세출 확대를 동시에 주장하였다. 금융 정책에서는 일본 은행법 개정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추진하려 했다.[72]- 고용 최대화를 일본 은행의 금융 정책 목적으로 설정
- 디플레이션 상황에서 인플레이션 목표 정책 도입, 중앙 정부가 목표를 결정하고 일본 은행에 지시하여 물가를 계획적으로 상승
- 일본 은행 총재와 부총재의 해임권을 정부에 부여
이를 통해 인플레이션 목표를 설정하고 중앙 정부가 경기를 관리하며, 일본 은행의 독립성을 축소하는 방향을 제시했다.[72]
또한, 당의 경제 정책은 다음과 같았다.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 명목 4% 이상의 경제 성장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3. 6. 기타 정책
- 국가 공무원 수 감축, 급여 삭감, 낙하산 인사 전면 금지, 규제 완화를 통한 경쟁 촉진, 공영 사업의 민영화를 통한 "탈 관료"를 추구했다.[20]
- "끈 달린 보조금"과 지방 교부세 폐지를 통한 지방으로의 재원 이양 및 지역 주권형 도주제 도입을 통한 "지역 주권"을 주장했다.[20]
- 경제 성장에 따른 고용 창출 및 세이프티넷 구축을 통한 "생활 중시"를 내세웠다.[20]
- 재원과 관련해서는 "매장금은 30조 엔이며, 향후 3년간 증세를 하지 않는다", "그 후의 항구적인 재원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 "아시아 속의 일본"을 중시하는 외교를 목표로 했으며, ODA의 전략적 운용 및 온실 가스 감축 목표를 1990년 대비 2020년에 25% 감축, 2050년에는 80% 감축으로 설정했다.
- 영주 외국인에 대한 지방 선거권 부여 (외국인 참정권)에 반대 입장을 취했다.[69]
"작은 정부" 노선을 정책의 기본으로 삼아[70], 규제 완화를 통한 경쟁 촉진 및 공영 사업의 민영화, 지방 분권, 경제의 대외 개방 등의 정책을 내걸었다. 대표인 와타나베 요시미는 고이즈미 개혁의 기둥 중 하나였던 공무원 제도 개혁을 "미흡했기 때문에 개혁을 철저히 하겠다"며 구조 개혁의 핵심 과제로 삼았다.
고용 대책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책 실현을 목표로 했다.
- 비정규직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에 대한 고용 보험 적용
- 해고 규칙을 법으로 명확화,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실현
- 경제 성장에 따른 최저 임금의 단계적 인상
또한, 다음과 같은 소득 재분배 정책을 내놓았다.
- 저소득층에 대한 "급여 부착 세액 공제 방식" 도입
- 생활 보호의 "모자 가산" 부활
- 고액 소득자에 대한 소득세·상속세 등 과세 강화
- 기초 연금 및 생활 보호를 통합한 "미니멈 인컴" 도입
일본 은행법 개정으로 화폐에 대한 개입을 주장하기도 했다.[71]
당의 경제 정책 중 재정 정책에서는 감세와 세출 확대를 동시에 제창했다. 금융 정책에서는 일본 은행법 개정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72]
- 고용 최대화를 일본 은행의 금융 정책 목적으로 설정
- 디플레이션 경향인 상황에서 인플레이션 목표 정책 도입, 목표는 중앙 정부가 결정하고 일본 은행에 지시하여 물가를 계획적으로 상승
- 일본 은행 총재와 부총재의 해임권을 정부에 부여
이는 인플레 목표를 정한 중앙 정부에 의한 경기 관리 정책 (총수요 관리 정책)과 일본 은행의 독립성 축소 노선이었다.
'''기타'''
4. 조직
와타나베 요시미는 기자 회견에서 "관료에 의존하는 자민당, 노조에 의존하는 민주당과는 달리, 진정한 개혁을 할 수 있는 것이 모두의 당이다"라고 호소하며 정계 재편 움직임을 예상하고 당을 창당했음을 밝혔다.[17] 이 당에는 와타나베 외에 초선 이후 무소속으로 활동해 온 에다 켄지, 자민당에서 야마우치 코이치, 히로츠 모토코 등 4명의 전 중의원 의원, 민주당에서 아사오 케이이치로참의원 의원이 참여했다.
모두의 당은 특정 업계나 노동조합에 의존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에게 뿌리내린 정당을 표방하며 결성되었다.[20]
모두의 당 정책에 찬동하는 18세 이상의 일본 국민은 소정의 당비를 납부하면 입당할 수 있었다. "일반 당원"과 "넷 당원" 두 종류의 당원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어느 쪽이든 동등한 당원 자격을 가졌다.
- 일반 당원 (당비는 연 2000엔)
- * 입당 시 당의 로고 마크를 본뜬 오리지널 핀 배지가 주어졌다. 당 홍보지는 우편으로 발송되었다.
- 넷 당원 (당비는 연 1000엔)
- * 당 홍보지는 PDF 파일 형식으로 배포되었다. 이메일 매거진이 발송되었다.
당원 수는 일반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정치 자금 수지 보고서에 게재된 당비 납부자 수의 추이는 다음과 같다.
2009년 사이타마시 시장 선거에서 시미즈 하야토가 당선되면서 지방 의회에서 의석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후 통일 지방 선거에서 도도부현 의회 의원 41명, 정령 지정 도시 의회 의원 40명이 당선되는 성과를 거두었다.[17]
2013년 12월 31일 총무성 조사에 따르면, 당시 모두의 당 소속 지방 의원 수는 다음과 같았다.[132]
구분 | 인원 |
---|---|
도도부현 의회 | 50명 |
시 의회 | 175명 |
특별구 의회 | 42명 |
정촌 의회 | 20명 |
합계 | 287명 |
4. 1. 대표
대 | 성명 | 재직 기간 |
---|---|---|
1 | 와타나베 요시미 | 2009년 9월 ~ 2014년 4월 |
2 | 아사오 게이치로 | 2014년 4월 ~ 2014년 11월 |
4. 2. 역대 임원
역대 임원 | |||||
---|---|---|---|---|---|
대표 | 간사장 | 정책조사회장 | 국회대책위원장 | 참의원 국회대책위원장 | 취임 연월 |
와타나베 요시미 | 에다 겐지 | 아사오 게이치로 | 야마우치 코이치 | 2009년 9월 | |
미즈노 켄이치 | 에구치 가츠히코 | 2010년 7월 | |||
아사오 게이치로 | 미즈노 켄이치 | 2013년 8월 | |||
아사오 게이치로 | 미즈노 켄이치 | 나카니시 겐지 | 마츠다 코타 | (공석) | 2014년 4월 |
역원회는 대표, 간사장, 정책조사회장, 국회대책위원장, 참의원 의원으로 구성된다. 결당 시에는 직함을 '파트너'로 사용했다.[1]
4. 3. 당원
모두의 당 정책에 찬동하는 18세 이상의 일본 국민은 소정의 당비를 납부하면 입당할 수 있다. "일반 당원"과 "넷 당원" 두 종류의 당원 제도가 마련되어 있으며, 어느 쪽이든 동등한 당원 자격을 가진다.- 일반 당원 (당비는 연 2000JPY)
- * 입당 시 당의 로고 마크를 본뜬 오리지널 핀 배지가 주어진다. 당 홍보지는 우편으로 발송된다.
- 넷 당원 (당비는 연 1000JPY)
- * 당 홍보지는 PDF 파일 형식으로 배포된다. 이메일 매거진이 발송된다.
당원 수는 일반적으로 공개되지 않는다. 정치 자금 수지 보고서에 게재된 당비 납부자 수의 추이는 다음과 같다.
4. 4. 출판물
매월 5일경에 '모두의 가와라반'이라는 당 홍보지를 공식 사이트에 공개하고 있다.[77]4. 5. 기타
2009년 12월에 가와다 류헤이는 "모두의 당에는 당론 구속이 없다"는 점을 입당 이유로 들었지만[78], 2011년 3월에 당의 방침에 반하여 아동 수당 연결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테라다 노리키는 직무 정지 6개월 처분을 받았다.[79]4. 6. 지방 조직
2009년 사이타마시 시장 선거에서 시미즈 하야토가 당선되면서 지방 의회에서 의석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가쓰시카구 의회 의원 선거에서 1석을 획득했고,[17] 2010년 2월 마치다시 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추천 후보 1명을 포함하여 2석을 획득했다.[17] 같은 해 5월에는 아이치현 오하루초 시장 선거에서 모두의 당 단독 추천 후보인 이와모토 요시히로가 당선되었다.[17]2011년 통일 지방 선거에서는 도도부현 의회 의원 41명, 정령 지정 도시 의회 의원 40명이 당선되는 성과를 거두었다.[17] 도치기현 의회에서는 제2회파, 가나가와현 의회에서는 제3회파, 요코하마 시의회에서는 제4회파가 되었다.
모두의 당은 지방 의회에서 회파를 구성할 때, 회파명에 "모두의 당" 또는 "모두"라는 문구를 넣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당 해산 이후, 각 지방 조직은 해산되거나 회파 명칭을 변경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도쿄도 의회 회파 "모두의 당 Tokyo"는 "빛나라 Tokyo"로 명칭을 변경했다.[81] 가나가와현 의회 회파 "모두의 당 가나가와현 의원단"은 "현우회"로 명칭을 변경했다.[85]
2013년 12월 31일 총무성 조사에 따르면, 당시 모두의 당 소속 지방 의원 수는 다음과 같았다.[132]
구분 | 인원 |
---|---|
도도부현 의회 | 50명 |
시 의회 | 175명 |
특별구 의회 | 42명 |
정촌 의회 | 20명 |
합계 | 287명 |
5. 역대 선거 결과
선거 | 대표 | 소선거구 | 정당 명부 | 합계 | 순위 | 상태 | |||||||
---|---|---|---|---|---|---|---|---|---|---|---|---|---|
득표 | 득표율 | 의석 | 증감 | 득표 | 득표율 | 의석 | 증감 | 의석 | 증감 | ||||
2009년 | 와타나베 요시미 | 615,244 | 0.87 | 2 | 신규 | 3,005,199 | 4.27 | 3 | 신규 | 5 | 신규 | 6위 | 야당 |
2012년 | 2,807,244 | 4.71 | 4 | 2 | 5,245,586 | 8.77 | 14 | 9 | 18 | 13 | 5위 | 야당 |
선거 | 대표 | 선거구 | 정당 명부 | 의석 | 순위 | 지위 | |||||||||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 | 증감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 | 증감 | 선거 | 증감 | 총 의석 | 증감 | ||||
2010년 | 와타나베 요시미 | 5,977,391 | 10.24 | 3 | 신규 | 7,943,649 | 13.59 | 7 | 신규 | 10 | 신규 | 11 | 10 | 3위 | 야당 |
2013년 | 4,159,961 | 7.84 | 4 | 1 | 4,755,160 | 8.93 | 4 | 3 | 8 | 2 | 18 | 8 | 6위 | 야당 |
2010년부터 2012년까지의 정치자금수지보고서에 따르면, 모두의 당은 다음과 같은 수입을 기록했다.[75][76]
5. 1. 중의원
선거 | 대표 | 소선거구 | 정당 명부 | 합계 | 순위 | 상태 | |||||||
---|---|---|---|---|---|---|---|---|---|---|---|---|---|
득표 | 득표율 | 의석 | 증감 | 득표 | 득표율 | 의석 | 증감 | 의석 | 증감 | ||||
2009년 | 와타나베 요시미 | 615,244 | 0.87 | 2 | 신규 | 3,005,199 | 4.27 | 3 | 신규 | 5 | 신규 | 6위 | 야당 |
2012년 | 2,807,244 | 4.71 | 4 | 2 | 5,245,586 | 8.77 | 14 | 9 | 18 | 13 | 5위 | 야당 |
선거 | 당선/후보자 | 정수 | 득표수 (득표율) | 비고 | |
---|---|---|---|---|---|
선거구 | 비례대표 | ||||
(결당시) | 4/- | 480 | 해산 후이므로 정확히는 0. | ||
제45회 총선 | 5/15 | 480 | 615,244 (0.87%) | 3,005,199 (4.27%) | 그 후 3명 입당 |
제46회 총선 | 18/69 | 480 | 2,807,244 (4.71%) | 5,245,586 (8.72%) | 그 후 10명 이당 |
모두의 당 결성은 중의원 해산 후이므로 형식적으로는 결성 당시 소속 중의원 의원은 0명이었다.
5. 2. 참의원
선거 | 대표 | 선거구 | 정당 명부 | 의석 | 순위 | 지위 | |||||||||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 | 증감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 | 증감 | 선거 | 증감 | 총 의석 | 증감 | ||||
2010년 | 와타나베 요시미 | 5,977,391 | 10.24 | 신규 | 7,943,649 | 13.59 | 신규 | 신규 | 10 | 3위 | |||||
2013년 | 4,159,961 | 7.84 | 1 | 4,755,160 | 8.93 | 3 | 2 | 8 | 6위 |
선거 | 당선/후보자 | 비개선 | 정수 | 득표수 (득표율) | 비고 | |
---|---|---|---|---|---|---|
선거구 | 비례대표 | |||||
(결당 시) | 1/- | 242 | 그 후 1명 사직, 1명 입당 | |||
제22회 통상 선거 | 10/44 | 1 | 242 | 5,977,391 (10.24%) | 7,943,649 (13.59%) | 그 후 2명 입당 |
제23회 통상 선거 | 8/34 | 10 | 242 | 4,159,961 (7.84%) | 4,755,160 (8.93%) | 그 후 7명 탈당, 비례 당선 탈당자 1명 사망에 의해 보궐 당선 1명 |
해산 당시 모두의 당 소속 참의원 의원은 12명이었다.
; 해산 당시 참의원 의원
정당 | 의원 | 비고 |
---|---|---|
일본을 활기차게 하는 회·무소속회 | 마츠다 코타 | 2016년 정계 은퇴 |
이노우에 요시유키 | →무소속→자유민주당 (2019년 참의원 선거 낙선, 2022년 참의원 선거 당선) | |
야마다 타로 | →오사카 유신의 회→무소속→2016년 참의원 선거 낙선→자유민주당 (2019년 참의원 선거 비례 당선) | |
야마구치 카즈유키 | →일본 유신의 회 (2019년 참의원 선거 낙선, 2022년 참의원 선거 낙선) | |
다나카 시게루 | ※정당에는 참가하지 않음 (→무소속 자유민주당 회파) (2016년 참의원 선거 출마하지 않음) | |
교다 쿠니코 | ※정당에는 참가하지 않음 (→(구) 희망의 당→희망의 당→탈당→자유민주당 입당) (2019년 참의원 선거 출마하지 않음) | |
무소속 클럽 (원내 회파) | 나카니시 겐지 | →자유민주당 (2016년 참의원 선거 당선, 2021년 중의원 선거 당선) |
와타나베 미치타로 | →무소속 자민당 회파 (2019년 의원 사직, 나스시오바라 시장) | |
미즈노 겐이치 | →민진당 (2016년 참의원 선거 낙선) | |
야쿠시지 미치요 | →자민당 (2019년 참의원 선거 출마하지 않음) | |
미래의 당 | 와다 마사무네 | →일본의 마음을 소중히 하는 당→무소속→자유민주당 (2019년 참의원 선거 비례 당선) |
마츠자와 나리후미 | →무소속→(구) 희망의 당→희망의 당→일본 유신의 회→무소속→일본 유신의 회) (2019년 참의원 선거 당선, 요코하마 시장 선거 낙선, 2022년 참의원 선거 당선) |
6. 해산 후 동향
도치기 3구, 중 6
가나가와 4구, 중 2 참 2
비례 북관동, 중 3
비례 북관동, 중 1
비례 남관동, 중 1
비례 도쿄, 중 1
비례 도카이, 중 2
비례 규슈, 중 1
지바 선거구, 중 4 참 1
가나가와 선거구, 참 1
도쿄 선거구, 참 1
비례대표, 참 1
비례대표, 참 1
미야기 선거구, 참 1
사이타마 선거구, 참 2
가나가와 선거구, 중 3 참 1
아이치현 선거구, 참 1
비례대표, 중 1 참 1
비례대표, 참 1
비례대표, 참 1